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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연구 , 2009년, pp.265 -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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走馬樓 吳簡을 통해 본 六朝時代 '村'의 기원에 대한 연구

신성곤 
  • 초록

    六朝시대에 등장한 자연촌락으로서의 村의 기원을 기존 문헌자료만이 아니라 최근 長沙 走馬樓에서 출토된 吳簡에 대한 연구 분야 중 '丘'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그 성격을 분명히 하고, 村과의 유사성을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그 결과 丘는 규모가 里와 비슷하거나 약간 컸을 가능성이 있지만 鄕보다는 작은 자연취락이었고, 도시에서 떨어진 田野 특히 丘陵지대에 두어진 농경지를 포함한 民戶의 거주지이기도 하였다. 丘는 村은 이처럼 규모, 田地와 거주지가 포함된 기능, 자연촌락적 성격에서 매우 유사하다. 다만 村의 분포는 거의 전국적이지만 丘는 현재까지는 孫吳 통치시기 長沙郡 臨湘縣 부근에서만 발견된다. 丘는 방어설비를 갖추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村은 자위적인 방어기능이 포함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었던 것 같다. 丘는 또한 聚 또는 塢壁과 비슷하지만 군사적인 방어적 성격의 강약이나 규모면에서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塢壁도 분포가 지역적 한계가 있었던 반해 村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西晉 이후 군사적인 수요가 강했던 華北지역에서는 豪强이나 兵士가 주력을 이루는 塢壁이 활발하게 세워졌고,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는 家族이나 鄕里의 인사들이 중심이 된 塢壁이 주로 성립되었다. 이 두 유형의 塢壁은 규모면에서나 군사적 기능의 수요에서 차이가 있었고, 후자 유형의 塢壁은 방어시설이 빈약한 丘나 聚의 형태와 많이 닮았다. 결국 後漢 이래 鄕里共同體의 약화와 전란의 피해에 따라 농민들은 都市를 벗어나 田野로 나아가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集落을 형성하였는데, 지역적인 차이와 군사적 수요에 따라 그 규모나 성격에 차이가 있었지만 다양한 자연 집락이 형태와 지역적 성격에 따라 聚, 邨, 村塢, 村堡, 廬舍 등으로 불렸다. 이들 자연촌락이 국가의 말단 행정조직에 편입되면서 통일적인 용어를 필요로 하게 될 때 대표 호칭으로 사용된 것이 “村”이었다. 丘는 이런 다양한 자연촌락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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