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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 2009년, pp.29 - 54   http://dx.doi.org/10.25024/ksq.32.4.200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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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종두의양성소의 설립과 활동

박윤재 
  • 초록

    1896년 출범할 예정이던 종두의양성소는 1897년 봄 사립병원인 찬화병원의 부속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종두의양성소를 설립, 운영한 이는 일본인 의사 후루시로 바이케이였다. 그는 구식의 우두법으로 인해 조선인들이 우두접종을 기피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우두법을 조선인 학생들에게 전수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종두의양성소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후루시로의 양성소 설립은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문화시설의 보급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회복하려는 일본의 대한(對韓) 정책을 보조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종두의양성소 입학에 특별한 자격은 요구되지는 않았고, 수업은 통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교육 내용은 후루시로가 편찬한 『종두신서(種痘新書)』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우두 접종부터 두묘를 보관하는 방법, 즉 우두 시술과 관련된 모든 과정을 교육받은 것으로 보인다. 수업 기한은 1개월이었지만 대체로 4-8개월 정도 재학하였다. 하지만 교육 기간은 일정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 기간을 인정받아 졸업과 동시에 종두의 면허를 취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은 종두의양성소 졸업생들을 서울과 지방에 파견하여 우두법을 확산시키는 데 활용하였다. 졸업생들은 서울의 외곽에 설치된 종두소(種痘所)와 함께 각 지방의 종두사무위원(種痘事務委員)으로 파견되어 우두를 시술하였다. 나아가 각 지방에 파견된 졸업생들은 그 지방의 종두의를 인가함으로써 우두법의 정착을 도모하였다. 이런 활동은 지방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종두의 양성이 중앙 차원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종두의양성소 졸업생들의 활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나가면서 교육의 주체였던 후루시로의 명망도 높아져갔다. 그 명성으로 인해 그는 1899년 설립된 관립 의학교의 초대 교사가 될 수 있었다. 후루시로가 의학교 교사로 임용되면서 종두의양성소는 자연스럽게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의학교의 설립은 서양의학이 우두를 상징처럼 이용하던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 정립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종두의양성소는 의학체계의 내용이 우두에서 의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활동한 과도기적인 교육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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