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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진도병풍》에 반영된 사실과 관념에 대한 검토—임진왜란 시기 울산 도산 전투와 관련하여— 원문보기
A review of the reflected reality and notion in a folding screen of the Joseon military camp paintings- with regard to the Battle of Ulsan Dosan Castle in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98 -

  • 저자

    최현숙

  • 학위수여기관

    울산대학교

  • 학위구분

    국내석사

  • 학과

    역사.문화학과

  • 지도교수

    양상현

  • 발행년도

    2014

  • 총페이지

  • 키워드

  • 언어

    kor

  • 원문 URL

    http://www.riss.kr/link?id=T13540240&outLink=K  

  • 초록

    정유재란 시기인 1597년 12월부터 1598년 1월까지, 그리고 1598년 9월부터 10월까지 울산에서 조명연합군과 울산 도산성(島山城)에 주둔한 일본군 사이에 대규모의 전투가 발생하였다. 이를 흔히 1 2차 도산(島山) 전투라 부른다. 도산 전투에 관한 연구는 한국과 일본에서 다수 이루어져 있으나 현재까지의 연구는 주로 문헌 사료에 치중한 경향이 강하다. 이와 관련하여 근래 국내에《조선군진도병풍(朝鮮軍陣屛屛風)》이라는 그림이 알려진 것은 도산 전투 연구에서 상당히 주목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본고는《조선군진도병풍》의 여러 이본(異本) 중 나베시마호우코우카이 쵸코칸((財)鍋島報效會 徵古館, 이하 '나베시마보효회')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이하 '보효회 본')을 대상으로 본 그림이 담고 있는 도산 전투에 관련한 사실과 도산 전투에 관해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관념이 그림 속에 표현되어 있는 방식과 그것에 담겨 있는 역사적 의미를 검토하였다. 보효회 본《조선군진도병풍》의 원본은 17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원본은 1874년 사가의 난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후 1886년에 마츠다이라 본(17세기 중반에 제작된 원본의 모사본임)을 토대로 그림의 전면 모사가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현재 보효회 본이다. 《조선군진도병풍》은 '6폭 병풍 3척(六曲三隻)'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차 도산 전투를 배경으로 하여 도산 전투의 전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제1도〉에는 조명연합군의 포위와 일본군이 농성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제2도〉에는 연합군과 일본군 구원 부대를 중심으로 연합군의 선발대와 일본군 조총 부대가 대치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제3도〉에는 연합군의 퇴각에 따라 일본 구원군이 추격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그림은 당초 '6폭 병풍 2쌍'(4척)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3척만이 전한다. 그러나 그림의〈제1도〉와〈제2도〉가 서로 다른 각도의 공간과 순차적인 시간 구성을 산수의 배치와 인물의 시선들을 통해 하나의 공간화로 시도하고 있어, 원형은 2쌍(4척)이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군진도병풍》은 지형, 계절 등 사실에 관한 사항을 실제 사실(fact)에 입각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또한 연합군의 공성 및 일본군의 농성을 비롯한 전투 전개 과정에 관한 묘사는 도산 전투에 관한 당대 및 후대의 풍부한 기록을 효율적으로 압축하여 작품 속 적절한 위치에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다만《조선군진도병풍》속에 반영된 도산 전투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도산 전투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념이 서로 공유되고 일반화하는 과정을 거쳐 재생산된 기록을 바탕으로 표현되었다. 즉, 그림은 도산 전투를 지극히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지만, 이러한 '사실성'은 실제 사실과 당시 사람들이 지닌 관념의 불안정한 혼합을 통해 만들어진,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일반적인 것이라 믿는 지식체계를 그 근본적인 속성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성은〈제3도〉에 나타난 추격전의 반영 양상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제3도〉의 추격전은 사료상의 서술차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이들이 도산 전투의 실체로서 관념적으로 느꼈던 모습, 즉 도산 전투에 대해 당대 사람들이 사실로서 인식해오던 일반화된 지식 체계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작자는 이러한 사실 체계를 기반으로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도산 전투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에 위배되지 않도록 성실히 묘사하고자 노력하였다. 본 그림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존하는 모든 이본(異本)이 동일한 구도를 가지고 있고 또한 그림 전체에 조선 출병을 불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이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였다. 이점에서 모사본인 보효회 본이 소실된 원본의 고식(古式)을 충실히 재현하고자 의도하였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나 작품이 모사된 메이지(明治) 시기에 일본은 정한론(征韓論)이 팽배하였다. 때문에《조선군진도병풍》제작이 가지는 사실성의 추구 경향은 본 그림이 조선 출병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작품의 원본과 모사본이 제작될 당시 각각 발생하였던 지역 내 혼란과 분열상을 작품 속에 관통하는 '정한'의 개념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던 제작 주체의 의도와 이에 대한 광범위한 동조 현상이 하나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그림의 제작 주체는 재현성에 충실한《조선군진도병풍》의 제작이라는 행위를 통해 본 그림이 가진 '정한'의 속성에 전통과 역사성을 부여하였고, 당시 지역 내 위기 상황 속에서 이를 돌파하기 위한 일종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그림에 부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조선군진도병풍》의 원본과 모사본 모두 제작된 이후 각각 마츠다이라 가문, 구로다 가문 등으로 파급되었고 이로써 정한의 역사는 여러 곳에서 공유되었다. 현존하는《조선군진도병풍》은 비록 모사본이긴 하나 그림이 가진 일본 내에서의 가치는 본 그림이 소실된 후 불과 10여 년 만에 복원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조선군진도병풍》이 기록화로서 가진 묘사의 사실성과 함께 그것이 내재하고 있는 가치의 실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우호와 적대가 일정한 주기를 두고 교차 반복하는 인상을 주는 한일 관계의 속성상 이러한 작업은 지속적으로 유효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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