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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 百濟의 將軍號 활용과 그 의미 원문보기

  • 저자

    박찬우

  • 학위수여기관

    高麗大學校 大學院

  • 학위구분

    국내석사

  • 학과

    韓國史學科

  • 지도교수

    朴大在

  • 발행년도

    2014

  • 총페이지

    ii, 63 p.

  • 키워드

    장군호;

  • 언어

    kor

  • 원문 URL

    http://www.riss.kr/link?id=T13541305&outLink=K  

  • 초록

    본고에서는 5~6세기 백제의 將軍號 활용 양상을 살펴보고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검토해 보았다. Ⅱ장에서는 우선 5세기에 백제가 활용한 중국식 官號 전반을 검토하였다. 이에 따르면 府官호는 사신이 임시로 겸한 名號로 볼 수 있으며, 太守號는 南朝와의 관계 속에서 통용된 의례적인 작호로 볼 수 있다. 한편 王·侯號는 중국의 官制에 포함된 것이 아니므로 대중관계와는 무관하며, 백제 내에서 受爵者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다음으로 백제가 활용한 장군호는 宋, 南齊 등 중국 南朝의 장군호로서, 品階가 있으며 왕도 책봉호로서 '장군호'를 지니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왕 이하 여러 受爵者의 서열을 가시적으로 나타냈을 것이다. 한편 고창에서 출토된 將軍印은 梁代 '伏義將軍之印'으로 여겨지며, 梁과 백제의 공식적인 교섭을 통해 백제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백제에서 적어도 6세기 전반까지 장군호가 활용되었으며, 宋, 南齊 이래 梁代에 이르기까지 南朝와의 관계 속에서 장군호가 활용된 것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백제가 활용한 장군호의 성격을 검토해 보았다. 우선 백제의 장군호는 군사적인 측면과는 무관하며 品階가 있기 때문에 서열표시 기능과 관련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장군호가 활용되었던 시기에는 이미 관등제가 백제 내의 지배세력을 서열화하는데 기능하고 있었다. 또한 최근의 연구 성과를 참고해 본다면 중국 南朝의 장군호는 散官的 성격과는 거리가 있으며 서열과 관련하여 체계적으로 운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백제가 활용한 장군호는 단지 受爵者의 명예를 돋보이게 하는 작호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Ⅲ장에서는 장군호 활용의 대외적 배경을 검토해 보았다. 장군호의 수여방식을 살펴보면, 백제왕이 假授한 장군호에는 '行'字가 冠해져 있으며, 중국 황제의 除正을 기점으로 그것이 탈락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중국에서 장군이 그 부관을 '辟召'를 통해 임명한 것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백제왕의 장군호 假授와 除正 요청은 백제왕이 '장군'으로 책봉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백제의 장군호 활용은 백제의 對南朝交涉과 이에 따른 왕의 '장군' 책봉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의 주변국에서도 왕 이외의 인물들이 장군호를 수여받은 사례가 있으나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직접 수여받았다. 반면 백제와 왜에서는 假授·除正을 거치면서 장군호를 내부적으로 활용했으며, 특히 백제가 왜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백제의 장군호 활용은 어디까지나 내부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선택에 불과했으며, 중국 왕조의 책봉을 계기로 외부에서 강제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Ⅳ장에서는 백제의 장군호 활용이 지니는 의미를 당대의 정치적 상황 및 백제사회의 특성을 토대로 파악해 보았다. 한성기 비유왕·개로왕대에는 대체로 대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그와 같은 정국을 전환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장군호가 활용되었다. 한편 웅진기 동성왕대를 살펴보면 장군호의 활용은 한성기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권위를 높이거나, 왕권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는 것 등과 연결되었다. 또한 여러 지배세력 간의 세력균형과 견제를 통해 왕권을 안정화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와도 관련이 있었다. 이처럼 백제에서 장군호는 왕권이 약화되거나 대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그러한 정국을 전환시키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백제의 장군호 활용은 馬韓 단계에서 魏晉의 관작을 수여받은 역사적 경험, 그리고 印綬衣幘 및 중국 관작에 대한 선호의 풍조와 관련이 있었다. 중국제 물품이나 중국 관작에 대한 백제사회의 우호적 인식은 이후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방증하는 것이 4~5세기 무렵 백제 왕권이 중국 陶瓷 등의 중국제 물품을 통치 행위에 활용한 사실이다. 장군호도 기본적으로 중국의 관직이며 내부 통치에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즉 장군호의 활용은 중국제 물품, 중국 관작에 대한 백제사회 전반의 우호적 인식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효용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요컨대 백제는 南朝와의 교섭을 계기로 장군호를 내부 통치에서 활용했으며, 이는 중국의 관작이나 물품이 백제사회에서 선호되어 정치적 효용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에 따라 장군호는 대내외적으로 정국이 불안정한 시기에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활용되었다. 이러한 백제의 장군호 활용은 고창 출토 將軍印으로 볼 때 6세기 전반까지는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이르는 백제의 장군호 활용은 당시의 국제적 환경과 이에 따른 백제의 대외정책, 그리고 백제사의 역사적 특수성과 당대의 정치 상황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장군호의 활용이 당시의 대외환경과 백제사회의 특성을 동시에 고려한 백제 왕권의 현실 대응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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