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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상세정보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원문보기

  • 저자

    김경태

  • 학위수여기관

    고려대학교 대학원

  • 학위구분

    국내박사

  • 학과

    한국사학과

  • 지도교수

    강제훈

  • 발행년도

    2014

  • 총페이지

    iv, 298 p.

  • 키워드

    임진전쟁 임진왜란 강화교섭 宣祖 神宗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沈惟敬 柳成龍 石星;

  • 언어

    kor

  • 원문 URL

    http://www.riss.kr/link?id=T13542607&outLink=K  

  • 초록

    본 논문은 임진전쟁기에 진행되었던 조선‧명‧일본 세 나라 사이의 강화교섭에 대한 연구이다. 강화교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 발발 직전 쓰시마(對馬)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조선의 교섭부터 분석 대상에 두어야 한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의 평양 탈환 전투와 정유재침기의 전투시기를 제외한 전쟁의 전 기간 동안 강화교섭은 계속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고 일본군과 명군이 조선에서 철수한 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와 조선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국교 재개교섭도 강화교섭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강화교섭은 장기간 진행되었다는 점은 물론, 대치하는 양 측의 교섭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각국의 다양한 주체들의 지향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임진전쟁 연구의 기준으로서 강화교섭은 전쟁의 전체 기간을 설명하기 위해 유용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세 나라가 참여하였으며 이후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이 전쟁의 복잡성과 입체성을 살피기에 좋은 도구이자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임진전쟁기의 강화교섭은 오랜 기간 동안 시대적 요구에 의해 주목받지 못하였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와 명의 책봉이라는 상반된 조건 속에서 기만적인 교섭이 이루어졌고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는 정형화된 해석이 반복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강화교섭이 전쟁에 임한 주체들의 상호행위라는 점이 간과되기도 하였다. 본 연구는 강화교섭을 전쟁 발발에서 종결에 이르는 전체 기간 속에서 연속된 과정으로 파악하였으며, 강화조건을 제시하고 이에 대응하는 교섭의 상호 구도, 교섭에 추진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상호적인 국면을 추적하였다. 또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이 수행한 강화교섭의 실상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각국의 정치 구조와 논의 형태, 그리고 개별 주체들의 정치적인 움직임에 주목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세 나라가 서로에게 가진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조선과 명은 조공책봉체제와 事大字小관계하에 사신들의 왕래에 의한 정기적인 접촉을 가졌지만 형식적인 틀을 벗어난 교류는 거의 없었다.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예고되었으나 조선과 명의 일본 인식하에서는 대규모 전쟁을 예상하기 어려웠다. 일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조선의 협조하에 수월하게 명을 침략할 수 있을 것으로 오판했다. 일본군은 승승장구하던 전쟁 초반을 지나자 조선인의 저항과 군량 부족이라는 문제에 부딪혔다. 명의 구원도 예상되었다. 일본군은 앞으로의 전쟁 수행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선봉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쓰시마군은 평양에서 전진을 멈추고 강화교섭을 기다렸다. 명의 병부상서 석성은 대규모 구원군을 파견하기 전에 심유경을 파견하여 일본군의 현황을 파악하려 했다. 심유경은 공격을 준비하던 명군과 달리 협상을 통해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했다. 의주로 밀려난 조선 조정은 의병들의 활동과 명군 구원군 파견 소식을 전해 듣고 앞으로의 전황에 대한 기대를 가졌으며 강경한 강화 반대론을 고수하였다.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평양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여 평양을 탈환했다. 심유경의 강화론은 폐기되었다. 그러나 한성을 수복하기 위해 전진하던 중 벽제관에서 일본군에게 일격을 당한데다가 군량과 말먹이 부족이 심각하여 더 이상의 전투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명군 지휘부는 일본군과의 강화교섭을 선택하였고 심유경에게 다시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명군이 말하는 강화교섭은 일본군이 책봉과 조공을 허락해주면 조선에서 물러나기로 했기에 들어주기로 했다는 외피를 쓰고 있었다. 일본군 역시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허락을 얻어내기로 했다. 히데요시는 '명이 강화를 요구했다'는 선언과 진주성 섬멸 명령을 통해 퇴각의 명분을 만든 후에 강화교섭에 임하기로 하였다. 히데요시는 외부로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내부로는 강경한 자세를 고수하는 양면적 태도를 보였다. 명군에 대한 군량 공급에 실패한 조선은 명군의 강화교섭에 반대할 명분이 부족해졌다. 대국의 자존심으로 오랑캐를 징벌해달라는 논리를 펼쳤으나, 항복하는 오랑캐를 벌할 수 없다는 논리에 막히고 말았다. 세 나라는 강화에 임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논리와 명분을 동원해야했고 이는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1593년 5월, 규슈(九州)의 나고야(名護屋)에서 이루어진 명군 사절과의 교섭에서 히데요시는 명 조정과의 혼인, 조선 영토 분할, 조선 왕자의 인질, 등으로 이루어진 7개의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조건은 고정된 것이 아닌 협상을 통해 조정이 가능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결코 방대한 전리품을 요구할 만큼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전쟁을 승리로 포장할 인질이라는 요소에 치중하기로 했고 몇 차례의 조정 끝에 1595년 5월,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조건만을 남겼다. 당시 일본의 정치 구조는 히데요시의 독재와 그의 명령을 독점적으로 수행하는 한정된 이들로 구성된 형태였고, 조선이나 명과 같은 논의 구조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한 개인의 의지를 원활하게 관철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같은 정치 구조가 조금 더 유리할 수 있었다. 반면에 조선과 명에서는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반드시 논의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고, 정책을 수행하는 자는 실책으로 인한 탄핵 가능성을 감수해야 했다. 명 측에서 강화교섭을 담당한 병부상서 석성, 명군 지휘부의 송응창 등은 일본군과의 교섭을 진행하는 동시에 명 조정의 반대파들에 의한 정치적 공격에 대응해야만 했다. 한편, 조선은 단순한 강화 반대론으로는 전쟁 국면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선은 일본군이 조선에 계속 머무르고 있으며, 단순히 책봉과 조공만을 바라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등, 강화교섭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명 조정에 고하여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교섭을 견제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조선으로서는 명 조정과 명군, 그리고 일본군 사이에서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다. 조선이 유지하고자 한 주체성은 명을 중심으로 한 세계 속에서 유력한 속국으로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것은 선조와 지배층이 기대고 있던 권위의 원천 중 하나였다. 조선은 강화에 무조건 반대할 수도 그에 찬성할 수도 없었고, '사실'을 전함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군에게 있어서는 '사실' 그대로의 전달도 반대파에 의한 공격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명군 지휘부는 수차례 교체되었고 명 조정의 분쟁도 격화되고 있었다. 강화교섭은 이와 같은 정치 분쟁 속에 지지부진 하고 있었다. 명군 지휘부는 다방면으로 조선을 압박하여 일본의 책봉을 요구하는 주본을 명 조정에 올리게 했다. 이를 근거로 강화 추진파와 반대파로 갈리어 치열한 분쟁을 계속하던 명 조정의 여론은 강화파가 획득하게 되었다. 명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책봉하기 위한 책봉사가 파견되었고, 조선에서는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강화 반대론을 일시적으로 누그러트리고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은 명과는 다른 '건강한' 논의 구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책봉사와 통신사를 각각 명과 조선으로부터 받는 승전 증거로서 활용하고자 하였다. 1596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책봉사를 접견하고 책봉 의례까지 마쳤으나, 조선의 통신사에 대한 접견은 거부했다. 그리고 얼마 후 교섭 결렬을 선언했다. 그는 조선의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점, 조선이 자신에게 무례했다는 것, 통신사가 책봉사 보다 늦게 도착했다는 점 등을 결렬의 원인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왕자라는 조건은 이미 통신사로 교체된 이후였다. 히데요시가 결렬을 선언한 이유는 책봉사의 도망과 사절들을 접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건설하던 후시미성(伏見城)의 붕괴라는 일련의 사건에 더하여, 조선의 책봉사가 늦게 도착한데다가 낮은 관직의 관원이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이로 인해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고자 하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전쟁 위협을 통해 조선의 왕자를 일본에 인질로 오게 하여 전쟁을 승리로 포장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후 1597년 7월까지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다. 히데요시로서도 협상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는 쪽이 낫다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조선, 심유경 모두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전쟁이 재개 되더라도 교섭선을 유지하자는 약속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침을 일으킨 것은 수비가 가능한 최소한의 영토만을 점유한 채 조선과 명을 위협하여 조선 왕자를 얻어내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 역시 히데요시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끝없는 전쟁을 감내해야만 하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졌다. 전쟁에 대한 이와 같은 감정은 염전 의식과 함께 폭력성의 고양이라는 두 가지 면으로 분출되었다. 명에서는 강화교섭의 실패로 병부상서 석성이 실각했고 심유경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재자 파견된 명군 역시 몇 차례의 적극적 공격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제압할 수 없었고, 일본군은 당초부터 적극적인 공세보다 수비를 택하고 있었다. 이처럼 끝을 기약할 수 없는 대치 상황에 이르자 명군과 일본군 장수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강화교섭이 이루어졌고,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일본군이 철수를 준비하면서 철수교섭으로 이어졌다. 일본 측은 조선의 왕자 혹은 공물만이라도 받아낸 후 철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조선으로부터는 무엇도 받아내지 못했고, 다만 명군과 인질을 교환한 후에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는 데 그쳤다. 반면에, 정유재침으로 인해 다시 직접적인 침략의 피해를 입었고, 정응태의 무고사건 등을 통해 주체성의 위기가 더욱 높아진 조선 내에서 강화 반대론은 이전보다 강경해졌다. 일본군이 철수한 후, 조선은 명군이 행한 일본군 철수교섭의 진상을 명 조정에 알리고자 했으며, 명군의 공로를 칭찬해달라는 명군 지휘부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했다. 전투 종료 후에도 명 조정과 명군, 조선 사이의 분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성룡을 비롯한 전쟁 정국의 담당자들은 '主和'라는 오명을 쓰고 물러났다. 1600년 9월, 명군이 조선에서 모두 철수하였고, 명 조정에서는 전쟁 승리를 선포했다. 이후 명 조정은 조선과 일본의 일을 대체로 조선에 위임하였다. 명 조정은 외부의 사태가 유발하는 정치 분쟁에 의해 쇠약해지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새로운 권력 담당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조선에 국교재개를 요청해왔다. 조선은 강화 반대론을 고수할 수 없었다. 이는 이전의 역사를 반복할 위험이 있었다. 이후 수년에 걸친 쓰시마와의 교섭, 내부 논의 과정을 거쳐 조선은 마침내 回答兼刷還使를 일본에 파견하였고 250여 년간 지속되는 평화관계가 시작되었다. 이후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전쟁과 그 전후시기를 포함한 강화교섭의 양상이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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